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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교

겸손한 아론을 축복하신 하나님 (추수감사절)
출애굽기

겸손한 아론을 축복하신 하나님 (추수감사절)

모세가 바로 앞에서 계속 못한다고 물러서는 동안, 아론은 대언자로 함께 죽을 수도 있는 그 길을 묵묵히 따라갑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라고 협박했을 때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 죄에 굴복하기도 했습니다.

2인자로 살면서도 모세를 질투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것,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울 때 연약한 믿음으로 흔들렸던 그 죄까지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죄를 지었어도 그 안에 흐르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대제사장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숨어서 헌신한 것을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 조건 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자리를 하나님은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1.19
교만한 자들이 받는 심판
아모스 6강아모스 6:1-14

교만한 자들이 받는 심판

풍요를 누리던 지도자들이 성전의 그릇에 술을 담아 마시고 몸에 귀한 기름을 바릅니다. 다윗처럼 악기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조롱하듯 술 취해 흥얼거리는 것이지, 온 마음으로 찬양한 다윗의 믿음과는 다릅니다.

이들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권세가 대단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풍요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잊고 스스로 잘나서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자, 이방 신까지 섬기며 나라의 위기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백성들마저 그런 삶을 부러워하며 따라가면서 온 백성이 함께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기 전에 먼저 다른 성읍들의 몰락을 가서 보고 배우라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지진과 앗수르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지금 누리는 평안도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 사실을 잊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순간 보호의 울타리는 걷힙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산다는 약속은 지금도 그대로이므로, 정직한 삶과 진실한 믿음으로 그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1.12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강아모스 5:4-15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세상은 저택과 초가집을 다르게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믿음을 보십니다. 이스라엘은 사랑받은 백성이었지만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은 심판의 손을 드셨습니다.

무너진 성읍의 수는 심판의 크기가 얼마나 클지를 그대로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은 살 길을 알려 주신 것이지만, 믿음의 자취가 남은 곳들을 오히려 찾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형식만 남은 예배와 할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성대히 드려도 마음이 다르면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삶이 참된 예배입니다. 심판의 날에도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고 선을 구하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1.5
타락한 자들이 받는 심판
아모스 4강아모스 4:1-13

타락한 자들이 받는 심판

이스라엘 백성은 삼 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아침마다 벧엘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하나님을 이용해 잘 살아보려는 그릇된 신앙이었고, 통회하는 마음 없는 제사는 오히려 죄를 더하는 행위였습니다.

바산의 살진 암소처럼 복을 받고도 만족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뭄과 재앙으로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회개 대신 더욱 완악해졌고, 결국 소돔과 고모라처럼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심판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먼저 경고하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고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0.29
이스라엘아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 3강아모스 3:1-15

이스라엘아 이 말씀을 들으라

아모스는 온 족속 중에 이스라엘만 택하셨다고 전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백성을 은과 신 한 켤레 값에 팔고 계절마다 여름 궁 겨울 궁을 지어 사치했습니다. 선지자의 입을 막고 나실인에게 술을 먹인 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사랑이 클수록 배신의 아픔도 큽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처럼, 은혜를 받고도 절망하거나 두려움에 굴복하면 마음은 배신의 자리로 넘어갑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이방 나라보다 무거운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그만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고통이 목적이 아니라 회개가 목적이었기에, 그 자체가 사랑이었습니다.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이 무너져도 사마리아와 다메섹에 붙어 겨우 목숨을 구한 사람은 있습니다. 성도는 심판과 재림이 반드시 있음을 잊지 말고, 오늘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 내야 합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0.22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
아모스 2강아모스 2:6-16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낱낱이 말씀하십니다. 권세 자들은 의인을 은 한 냥에,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에 팔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다니는 음행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제단 옆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전당 잡은 옷을 깔고 누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힘이 없을 때는 말씀대로 살려 애썼지만, 풍요로워지자 이방 민족이 짓던 죄를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은혜를 자신의 공로로 돌리며 감사를 잊었고, 나실인에게 억지로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 협박했습니다. 이것은 이방 민족의 무지와는 다른, 율법을 받은 백성만이 지을 수 있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를 인도하신 은혜를 다시 일러 주시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곡식 단 실은 수레가 흙을 누르듯 심판이 임하면 빠른 자도 강한 자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심판이 이르기 전, 돌이키는 모습만 보여도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0.15
서너가지 죄로 말미암아
아모스 1강아모스 1:1-15

서너가지 죄로 말미암아

여러 나라가 차례로 등장합니다. 다메섹은 길르앗을, 가사와 두로는 사로잡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았고, 에돔은 형제를 짓밟았고, 암몬은 임신한 여인을 죽였고, 모압은 죽은 왕의 뼈를 파헤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다와 이스라엘 자신이 등장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신발 한 켤레 값에 팔고, 법정은 뇌물을 받고,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이방 나라들의 죄는 이스라엘에게 저지른 것이 아니어도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짓밟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지으신 분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이방 나라들의 죄를 지켜본 유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성전을 세워 주신 그 백성이 오히려 같은 죄를 되풀이했습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자리에서 지은 죄이기에 책망도 가장 무거웠습니다.

성전도, 오랜 사랑도 죄를 덮어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먼저 심판하시며 회개할 시간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끝내 듣지 않았고, 그 결과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자신은 남들보다 죄가 적다고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아직 회개를 모른다는 증거이며, 교만한 자리에 있다면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10.8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산상수훈 8강마태복음 5:1-12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도 하늘의 상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세상이 싫어합니다. 감추고 싶은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진리를 전하면 핍박이 따라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로 매를 맞았지만,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영혼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성도를 정금으로 만드는 용광로이므로, 그 시련을 피해 도망 다니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훈련의 강도를 높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고서야 자신의 입술이 부정했음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정직한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핍박과 고난은 성도가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감당하시며, 그 헌신을 보신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평안과 안식을 주십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9.24
화평케 하는자
산상수훈 7강마태복음 5:1-12

화평케 하는자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뺨을 맞으면 다른 뺨도 내주고 겉옷을 빼앗기면 속옷까지 내주라는 말씀이 그 화평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과 화평하시려고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물과 피를 다 쏟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자기 눈 속의 들보부터 빼내고 상대의 단점을 자기 단점을 고치라는 음성으로 듣고 회개하는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정으로 다듬은 돌처럼 인간의 의와 정성으로 꾸미면 받으실 수 없고, 토단처럼 있는 그대로 드리는 산 제물이라야 받으십니다.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틀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내 아들이라 하시며 천국에 들어갈 복을 주십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9.17
마음이 청결한 자
산상수훈 6강마태복음 5:1-12

마음이 청결한 자

무너져 가는 집에 거미줄이 걸려 있으면 아무리 좋은 음악도 소음으로 들립니다. 사람의 심령도 그와 같아서, 근심과 욕심의 거미줄이 걸리면 은혜도 충고도 의심하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성품이 착하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이 자랐다는 말입니다. 창문이 더러우면 아름다운 풍경도 보이지 않듯,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죄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백성은 올라오지 못했지만 모세는 부름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 생각과 두려움을 버리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꽃이 단단한 마음을 녹여 하나로 이을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교회가 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지 않는 삶으로 마음을 씻어갈 때, 그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뵙는 복을 받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9.10
하나님의 때와 우리가 정한 때 (설립20주년예배)
창세기

하나님의 때와 우리가 정한 때 (설립20주년예배)

물줄기 교회가 설립 2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작은 방 한 칸에서 방석을 놓고 예배드리던 성도들이 저마다 받은 은사로 헌신하며 교회를 단단하게 세워 왔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는 38년 동안 물이 움직이는 그때를 자기 때로 정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이미 정해 놓은 응답만 구하기 때문입니다. 야곱도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기 전까지는 자기 힘으로 두려움을 피해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빠르게 순종하는 길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 때를 맞추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을 때 이름이 바뀌고 형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듯이, 우리도 기도라는 열쇠로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요셉의 곳간에 나온 사람이 빈손으로 돌아간 적이 없듯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도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9.3
긍휼히 여기는 자
산상수훈 5강마태복음 5:1-12

긍휼히 여기는 자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를 욕심 내다가 선악과를 먹고 사망의 굴레에 갇혔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직접 육신을 입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돌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교회이고 여리고가 세상이라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안심하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자신의 구원만 소중히 여기는 신앙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여리고를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사랑을 보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 주십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3.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