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설교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 2
죽어야만 사는 나라 10강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 2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만난 뒤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손을 대면 병이 물러가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며 거듭났습니다.

바울이 은혜를 잊지 않은 이유는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유대인은 과거를 자기 앞에 둔다고 여겨서, 지나간 은혜를 늘 마주 보며 삽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셔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왕 앞에 결박당한 채 서서도 바울은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금 교회가 세상과 비슷해지려고 십자가와 회개라는 말을 지워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도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등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1.29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
죽어야만 사는 나라 9강사도행전 20:17-31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

다락방에서 말씀을 듣던 청년이 창가에 앉았다가 밤중에 잠에 빠져 삼층에서 떨어집니다. 이미 죽은 것 같았던 그 사람이 날이 새자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던 사울은 하늘의 빛과 음성 앞에 엎드러져 눈이 멀고, 그 자리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눈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데반을 죽게 한 사울을 부르시고 도리어 치료까지 시키시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붙들던 세상과 율법의 힘을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을 죽었다고 단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처럼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이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앞에서 세상이 힘이라 여기던 것을 내려놓을 때, 사도 바울처럼 끝까지 달리는 믿음을 살 수 있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1.22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요나
죽어야만 사는 나라 8강요나 3:3-4:4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요나

요나는 니느웨에 심판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낸 뒤에야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했고, 왕과 백성이 회개했습니다.

요나가 도망간 것은 심판을 전하다 당할 후환이 두려워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굳이 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 성을 살리실 것을 이미 알았기에 가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하자 요나는 오히려 하나님께 화를 냈고, 하나님은 하루 만에 시든 박넝쿨을 통해 요나가 십이만 명의 생명보다 자기 몸의 편함을 더 아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를 구원하라 하신 것은 명령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죄를 짓더라도 그 생명을 살리고 싶어 하시며, 그 마음을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성도가 받은 사명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1.8
무너진 성벽을 세운 느헤미야
죽어야만 사는 나라 7강느헤미야 2:8-20

무너진 성벽을 세운 느헤미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무너진 뒤, 총독으로 부임한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기며 성벽을 52일 만에 세웁니다. 방해하는 자들이 몰려들자 그는 백성들에게 칼과 창을 들려 일하게 했습니다.

성벽은 그저 벽이 아니라 성전을, 곧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울타리입니다. 성전을 되찾고도 성벽이 없어 이방인이 드나들며 제사가 형식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말씀과 기도와 거룩한 삶의 성벽이 없으면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니, 그 성전을 지키는 성벽을 스스로 쌓아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백성을 섬겼던 것처럼,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살면서 말씀과 기도로 성벽을 높이 쌓을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0.25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
죽어야만 사는 나라 6강요한복음 12:9-16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무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깔며 호산나를 외쳤고, 제자들도 함께 들떠 있었습니다.

이 환호는 죄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를 향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힘 있는 왕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무리가 훗날 예수님을 죽이라 소리쳤고, 베드로도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뒤에야 자신이 세 번 부인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것을 기대하며 부르는 찬양은 상황이 바뀌면 배신으로 돌아섭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이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로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욕심과 인간의 의를 버리고 정직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오늘 성도에게 요구되는 결단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0.18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미가야]
죽어야만 사는 나라 5강열왕기상 22:14-25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미가야]

아합왕과 여호사밧왕이 연합해서 길르앗 라못을 되찾으러 가기 전에, 아합은 자기 편에 서서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백 명의 선지자를 불러 승리를 물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미가야를 불렀고, 미가야는 사자의 귀띔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면 아합이 죽는다는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아합은 화를 내며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미가야는 이미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서 있었기에 왕 앞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듣기 좋은 말만 원하지만, 축복의 말씀은 그대로 임해야 하고 심판의 말씀은 회개함으로 틀려야 합니다. 책망을 듣고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라야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합은 변장을 하고 절충하며 전쟁에 나갔다가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미가야의 예언대로 죽었습니다. 다윗도 그일라성을 지켜준 은혜를 저버리고 배신할 백성들과, 아직 오지도 않은 사울의 진군을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그대로 믿어 미련 없이 성을 떠났습니다. 세상 줄을 놓지 못하면 믿음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 뒤로 튕겨 나가니,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서서 말씀하시는 것만 말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성도가 살길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0.11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욥
죽어야만 사는 나라 4강욥기 7:11-21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욥

하루 동안 자녀와 재산을 모두 잃은 욥은 겉옷을 찢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 고백하며, 원망 대신 찬송을 올립니다.

사탄은 욥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겼지만, 욥의 뿌리는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 깊이 내려 있었습니다. 잎사귀와 가지를 잘라도 죽지 않는 나무처럼, 그의 믿음은 형통과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고난을 죄의 증거로 몰아붙였지만, 그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람의 소망일 뿐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받는 자리이며, 신앙을 더 깊게 다듬는 훈련입니다. 욥은 고난을 지나며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끝내 빼앗기지 않는 복을 돌려받았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10.4
노아를 통해 방주를 만드신 하나님
죽어야만 사는 나라 3강창세기 6:5-14

노아를 통해 방주를 만드신 하나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아담의 죄로 저주받았고, 세상은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처럼 심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에 포악함이 가득함을 보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하셨습니다.

방주는 교회 건물이나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과 일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노아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버려 방주를 지었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사람들을 향해 애타게 소리쳤습니다. 방주 밖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판을 믿지 않았을 뿐, 심판은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홍수 뒤에도 노아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고, 술에 취해 넘어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책망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려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험한 세상에서 참된 방주가 되시며, 노아처럼 순종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방주에 태우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9.27
예수님과 나사로의 만남
죽어야만 사는 나라 2강요한복음 11:32-44

예수님과 나사로의 만남

나사로가 병들어 죽습니다. 예수님은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하시고, 나사로가 완전히 죽은 뒤에야 베다니로 오십니다. 마르다는 오빠가 죽기 전에 오지 않은 예수님을 원망하고, 돌을 옮기라 하시자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난다며 다시 불평합니다.

예수님이 늦게 오신 것은 나사로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완전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생명의 주인이 자신임을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냄새 난다며 의심한 그 모습이 바로 죄에 묶여 무덤에 갇힌 인간 자신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오라 부르시자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의가 죽고 십자가의 보혈로 죄에서 풀려날 때, 나사로처럼 자유롭게 새 생명을 얻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9.20
부림절의 축복을 만든 에스더
죽어야만 사는 나라 1강

부림절의 축복을 만든 에스더

하만의 조서가 각 지방으로 나갑니다. 아다르월 십삼일 하루, 유다인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야 할 처지에 놓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을 신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한 사람의 반항이지만, 아말렉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을 말살하려는 사탄의 계략이 그 뒤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략을 미리 아시고 에스더를 왕후의 자리에 세워 두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삼 일 금식한 뒤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미 세상을 향해 죽은 자로 섰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결단으로 왕의 마음을 얻었고, 위기에 처했던 동족을 구하고 하만을 도리어 심판받게 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춘숙 목사님 · 2020.9.13